4. 임주연의 세상
- 이밈달의 낯선 세상: 이밈달
- 2021. 12. 30. 14:00
엄마와의 사건 이후 삶의 동력으로 삼아왔던 무언가가 작동을 멈춘 기분이 들었다. ‘우리 가족들이 언젠가는 내 상처를 알아줄 거야.’ ‘언젠가는 내가 원했던 만큼 사랑받게 될 거야.’ 나를 살게 한 것은 아마 이런 것들이었으리라. 그러나 운명은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곳에 나를 데려다놓은 것이다.
열 살 무렵의 일이다. 나에게는 큰고모와 작은고모가 있었다. 무엇 때문인지 몰라도 그들은 종종 술에 취한 채 우리 집에 찾아와 행패를 부리곤 했는데, 그날 역시 그런 날이었다. 목적은 엄마인 것 같았다. 언니가 거실에서 큰고모와 몸싸움을 하며 그녀를 막았지만 작은고모가 대신 안방으로 들어가 침대 위에 있던 엄마의 목을 졸랐다. 나 역시 침대 위로 기어올라 울며불며 작은고모의 손을 떼어놓으려고 애썼다.
‘제발 우리 엄마 죽이지 마세요.’
‘하지 마세요.’
나는 그 말이 내 입에서 나오던 순간을 기억한다. 놀라 뜨거워진 볼과 그 위를 타고 흐르는 눈물의 감촉. 아무리 떼어내려 해도 꿈쩍조차 하지 않는 고모의 손. 내 목소리가 만들어내는 ‘죽이지 말라’는 말… 생경한 것이었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동시에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현실에 나는 속절없이 구속되었다.
엄마는 이를 악문 채 잔뜩 찡그린 표정이었고, 작은 고모의 얼굴은 맥락이 부족한 분노로 가득 차 있었으며, 아빠는 등을 돌린 채 침대 언저리에 앉아 있었다. 물론 아빠 역시 술에 취한 상태였던 것 같다.
이웃주민의 신고로 결국 집에 경찰이 왔다. 나, 엄마, 작은고모, 아빠 그리고 경찰관 두 명으로 좁은 안방이 꽉 들어찼다. 오래된 다세대 주택의 침침한 형광등 불빛과 그 아래 초라한 인간 세 명, 이방인 두 명.
경찰이 파출소로 고모들을 데려갔지만 결국 가족싸움이며 누가 죽은 것도 아니기 때문에 오래 붙잡아둘 수가 없다고 했다. 그렇게 모두 떠나고 고요가 감도는 집에서 나는 여전히 그들이 남기고 간 감정의 부유물을 느꼈다. 그 속에는 이 끔찍한 고통이 반복되고 말리라는 두려움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그날 고모들이 우리 집에 다시 왔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고요한 집과 두려움을 뒤집어쓴 아이. 그게 내 기억의 전부다. 또한 이유가 무엇이었든 간에, 그건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음이 분명하다. 아마 내가 잘못한 것은… 하나도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짓지도 않은 잘못에 벌을 받았다는 기분을 지울 수가 없다.
우습게도 겉보기에는 가족의 사이가 딱히 나쁘지 않았다. 아빠는 종종 내게 요리를 해줬고, 캠핑에 데려가줬으며, 대게 집에서 일을 하던 큰고모는 가끔 유황대게를 가져와 우리 가족과 함께 쪄먹었다. 엄마와는 종종 작은고모네 집에 놀러가기도 했다. 모든 것이 너무나 평범했다. 모두들 웃는 낯 뒤로 삐뚤어진 자아상과 표현되지 못한 감정들을 숨기고 있었던 것만 뺀다면 말이다.
지금에 와서는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원망스러운 마음은 덜어졌다. 직접 어른이 되어보니 산다는 것이 생각보다 녹록지 않다는 것을 나 또한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저 애석할 따름이지만… 그렇지만… 나는 겨우 열 살 남짓한 그 아이를 아직 놓아주기가 어렵다.
‘그런데 … 제가 힘들 줄 모르셨어요? 어머니. 아버지. 정말 모르셨어요?’ 청자가 사라진 질문은 독백이 되어 내 세상을 잔뜩 채웠다. 언젠가는 이 독백이 진정 대화로서 완성되는 날을 꿈꿨다. 그래서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어른이 된 아이가 세상에게 배운 것은… 삶의 고통에는 딱히 따져 물을 만한 별다른 이유가 없다는 냉정한 사실이었다. 내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그것들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 그것만이 중요했다.
나는 자주 생각했다. ‘그들은 대체 왜 그랬을까?’ 그러나 동시에 ‘왜?’라는 질문이 더 이상 의미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 또 그런 생각을 했다. ‘나는 어째서 고모의 손에 손톱자국 하나조차 내지 못했을까?’ 그러나 그 또한 내게 딱히 도움 되지 않는 상념일 뿐이었다.
내가 자신의 온전한 보호자가 된다는 것은 스스로를 책임지고 돌본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기억 속 어른들의 사연이 어땠는가에 대해 나는 관심을 끊었다. 자식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와 같은 일들을 겪어내야 했던 내 고통에 모든 관심을 두었다. 가족들은 언제나 조용히 다가와 내 가슴을 칼로 찌르고 후벼 판 다음 방치해버렸다. 어째서 이날 이때까지 그 모든 고통을 나 혼자 감내해야 했는지… 그 떫은 마음을 위로하는 것에 힘을 썼다.
아이는 어른과 다르다. 곧잘 감정과 상황에 압도당한다. 나는 부모님이 싸울 때마다, 툭하면 깨지곤 하던 우리 집 찬장의 장식품이 된 기분을 느꼈다. 그들의 문제와 나를 분리하지 못했다. ‘저 사람들은 나를 왜 낳았을까…’ ‘난 왜 하필 이 집에서 태어났을까…’ ‘내가 뭘 잘못한 걸까…’ 주연이는 그런 생각을 자주 하는 어린이였다.
나는 너무 아팠다. 너무 아팠으므로, 이 고통을 참아낼 명분이 필요했다. 삶이 내게 이러는 데엔 다 이유가 있을 거라고. 그러니까 어떻게든 참아내면 나는 보상받을 거라고. 그렇게 믿었다. 그러나 가족들은 ‘임주연’이라는 한 사람의 생을 위한 등장인물이 아니라, 모두 각자 생의 주인공이었다. 우리는 서로 부대끼며 살다 생이 맞닿는 점에서 이런저런 사건을 겪어낸 다음 또 다시 각자의 생을 살아갈 뿐이었던 것이다. 받아들이기 정말 어려웠지만, 이번 생에서 만난 그 누구도 나를 일부러 찌른 적은 없었다. 어쩌면 나는 참 운이 좋았던 것이다.
많은 날 동안 나의 삶을 떠나고자 했다.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엄마에게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자해, 자살시도를 반복하며 나의 존재를 해치려고 했다. 친구들에게 짐을 지웠다. 툭하면 일을 관뒀다. 사람들을 의심했다. 뒤돌아 욕을 퍼부었다. 까닭모르고 울었다.
어린 시절의 상처와 지저분한 기억들은 이처럼 커다란 돌이 되어 오랜 시간 마음에 걸려 있었다. 마치 소화불량에 고통스러워하듯 나는 어른이 된 후에도 아픔을 호소할 수밖엔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결국 내가 돌아온 곳은… 지금 여기, 나의 생이다. 커다랗던 돌은 어느새 마모되어 이제는 마음속 해변의 수많은 모래알 중 하나가 되어버렸다.
나는 종종 그 해변을 거닐며 사색에 잠긴다. 인생에 너무 많은 이름표를 붙였구나, 하면서. 이제 돌아가는 길, 나는 겸허한 마음으로 하나씩 그것들을 떼어낸다. 조심스럽게 그러나 단호하게. 오롯이 나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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