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생활 시작하고 몇 번째 이직했는지 확실히 기억나지 않는 회사에서 친해지게 된 프리랜서 선생님이 있었습니다. 슬하에 아들 둘이 있었는데, 딸 하나 있는 친구분이 아이들 동반 모임에서 선생님의 아이를 보고 “너희 애 ADHD 아니니?”라는 말을 해서 기분이 몹시 나빴다고 하더라고요. 매우 활동적인 아이이긴 하지만 병적일 만큼은 아닌데 친구가 말을 심하게 했다면서요. 세월이 흘러 그 친구분이 둘째 자녀로 남자아이를 낳았고 몇 년 뒤 다시 만나게 되었는데 "그때 그렇게 말해서 미안했다“고 뒤늦게 사과를 했다면서, 여자아이는 얌전하고 남자아이는 부산스러운 ‘일반적’ 성향을 키우면서야 알게 되었다더라는 말을 전해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세간의 ADHD(Attention Deficit Hyperactivity Di..
책 읽는 것만큼이나 영화 보는 것도 좋아하는 편인데요, 특히나 한 번 꽂힌 영화는 옆에서 누가 싫은 소리를 해도 보고 또 보며 되새김질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얼마 전 2편 제작에 돌입했다는 이 그렇고, 시리즈도 그렇습니다. 특히 1편은 대사나 효과음, BGM을 듣는 것만으로도 어떤 장면인지, 전체 러닝타임 중 어느 부분인지도 맞출 수 있을 정도로 영화 구석구석을 꿰고 있는데요. 가 거의 끝날 즈음 쉴드 기지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고 행방불명되었던 베너 박사가 맨해튼으로 돌아와 헐크로 변신하면서 읊었던 대사가 이상하게 자꾸 되뇌어지는 요즈음입니다. 저도 언젠가부터 헐크와 다를 바 없이, 항상 화가 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이러한 상태가 더러는 한국인의 ‘종특’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무한 경쟁적 환경인..
20대 중반에 부모님과 함께 전국을 여행해본 적이 있습니다. 당시 2년간 외국에 파견될 일이 생겨서, 그 전에 추억을 쌓고 오자는 취지로 4박 5일 동안 동/남/서해를 그날그날 컨디션과 기분에 따라 돌아다녀보기로 하고 길을 떠났어요. 부친은 워낙 여행을 좋아하고, 모친은 ‘캠핑은 싫지만 리조트 정도라면 같이 가주마’ 정도의 마인드를 가지신 분인데 단 하나(과연 하나일까...)의 치명적인 단점이라면 부친은 황소고집에 모친은 ‘참지 않는’ 현실주의자라는 것. 일단 마음먹은 지점까지는 가고 만다는 세상 쓸데없는 오기를 탑재한 부친은 직감과 지도만 믿고 신나게 가다가 간혹 막다른 길이 나오면 갓길에 차를 대고 지도를 하염없이 들여다보기를 반복했고, 조수석의 모친은 옆에서 답답해하며 날선 비난을 번번이 지치지도 ..
모든 존재는 실수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익혀가기 나름입니다. 누구라도 처음부터 완벽할 수는 없으니까요. 아기는 발을 떼고 제대로 걸을 때까지 약 3천 번 넘어져야 비로소 걸음마를 할 수 있게 된다고 합니다. 대략 3천 번의 실수를 통해 드디어 성공에 이르는 것이지요. 성장에 있어서 실행과 시행착오, 실패는 반드시 거쳐야 할 단계라는 것을 보여주는 가장 직관적인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미국 실리콘밸리의 성공한 최고경영자는 평균 2.8회 실패한 경험이 있다고 합니다. 글로벌 창업시장에서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격언은 정설로 통하는데, 실패를 용인해주는 문화에는 창업해서 결국 실패하더라도 거기서 많은 것을 배우고 더 발전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패를 통해 성숙해진 창업..
학부시절 여성학개론을 강의하시던 교수님께서는 소신과 가치관을 삶으로 확장시키는 모습이 굉장히 인상 깊은 분이셨어요.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본인의 박사학위를 위해 유학을 결심했고, 출산시기를 자신의 커리어에 맞춰 계획하고 실행했다고 하셨습니다. 학령기에 다다른 자녀가 하교 후 집에 혼자 있으면 정서상 좋지 않다는 주변의 우려(라 쓰고 오지랖이라 읽읍시다)를 무시하고 경력을 빌드업하면서 ‘아이도 부모의 사정에 적응해야 한다’는 뜻을 굽히지 않으셨다는 말씀을 눈을 반짝이며 들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에는 아직 흉자로서의 정체성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남편 되시는 분이 참 대단하고 배려심이 많다’느니, ‘교수님 자녀분은 어려서부터 참 외로웠겠다’느니 하는 생각도 했었네요(먼 산). 졸업하고 나서부터 이상과 현실..
꿈을 이루기 위해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는 서사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대중의 사랑을 받습니다. 한편으로는 스스로가 지금 진창에 굴려지고 있는 것이 꿈을 이루기 위함이라는 자위적 당위성의 발로일 수도 있고, 대리만족이나 애증 내지는 상황에 대한 합리화의 결과일 수도 있다는 비뚤어진 생각도 듭니다. 대체 꿈이 무엇이기에, 얼마나 대단하기에 이런 복잡다단한 감정과 연결될 수 있는 것일까요? 한때 소질과 적성의 조합, 자아실현 같은 것들 때문에 정말 머리 터지게 고민하고 방황했던 1인으로서, 꽤나 밀도 깊은 자기계발서인 을 읽다가 정말 오랜만에 이 ‘꿈’이라는 얄궂은 녀석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그다지 긍정적인 감정은 아니었던 것이, 마치 좋은 꼴 못 볼 꼴 다 본 오래된 인연을 마주한 것 같은 징글..
“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고전 명작으로 꼽히는 의 첫 문장입니다. 이 작품을 읽지 않은 사람이라도 한 번은 들어봤음직한 유명한 문장이지요. 과연 그렇구나, 하며 고전의 위대함과 영속성에 감탄하게 됨과 동시에, 이에 속하지 않는 너무나 분명하고 명백한 집단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됩니다. 바로 여성 빈곤 노인층의 일관성입니다. 사업 실패나 불우한 환경 등 남성 노인들이 각자 서로 다른 다양한 이유로 거리로 내몰렸다면 여성 노인들의 불행은 하나같이 닮았습니다. 가정 내에 얽매이는 한정되고 구조화된 한평생의 결과는, 본인의 의지와 역량에 의한 것이 아닌 가부장의 경제적 지위에 좌우되는 삶이다 보니 그렇게 그들만의 열악한 평균에 수렴될 수밖에요. 은 이..
부끄러운 과거를 고백하자면, 한동안 어린아이가 싫다고 아주 공공연히 밝혔던 적이 있습니다. 말이 통하지 않고 제멋대로 굴면서 빽빽 울기만 해서 싫다는 이유로요. 버스나 지하철에서 시끄럽게 칭얼대는 아이들을 보며 대놓고 인상을 쓰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때만 해도 아직 성적 대상화를 큰 저항 없이 체화하곤 했던 명예남성(속된 말로 ‘흉자’라고도 하지요)이었던지라, 스스로가 약자를 혐오하고 있다는 인식조차 하지 못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어요. 낯선 존재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도 한 몫 했던 것 같습니다. 지금이야 조카도 하나둘 생기고 친구들의 2세도 있어 아이들과 전에 비해 자주 접하게 되었지만, 그 흑역사 시기는 동생은 물론이거니와 사촌동생도 거의 없고 그야말로 주변에 저보다 어린 생명체가 전무하던 때였거든요..
평소에 읽을 책을 미리 정해두는 편입니다. 도서관 신착도서 명단을 훑기도 하지만, 읽을 책을 고르는 데 있어서 트위터가 매우 큰 지분을 차지합니다. 타임라인을 훑다가 누군가의 리뷰를 보고 혹하거나 신간도서를 알려주는 계정의 영업에 넘어가기도 하고, 출판사의 홍보에 솔깃해 앞으로 읽을 책 목록에 추가하곤 해요. 오늘 소개하게 된 는 트위터에서 누군가의 후기를 통해 알게 된 ‘소확혐(小’確嫌), 작지만 확실히 나쁜 기억‘이라는 흥미로운 부제의 책입니다. 이제 거의 지름신 영접을 위한 마케팅 용어가 되다시피 한 ‘소확행’에 기반한 개념이고요. 취업, 물가, 부동산 문제 등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시스템으로 인한 힘듦은 차치하고, 개별적이며 그보다 덩치가 작으면서도 나를 힘들게 하는 요소를 어떻게 대하면 ..
(남다른 검소함을 지닌 독자님이라면 이번 글은 건너뛰셔도 좋습니다. 탈고하고 나니 정말 별것도 아닌 걸 길게도 써놨다 싶고 영 쑥스럽네요;;;) 2021년 대한민국의 본질 그 자체라 할 수 있는 신자유주의 기조에서 돈은 참 많은 것의 기준이 됩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보다 많은 가능성을 꿈꿀 수 있는 쪽에 속하기를 희망합니다. 부자인지 아닌지는 기본적으로 중산층에 속하는지의 여부로 확인할 수 있는데요, 작년 초 의 보도에 의하면 정부가 OECD 기준으로 제안하는 한국 중산층 소득은 월 114만8500~344만5500원, 실제 국민들이 인식하는 중산층의 소득수준은 세후 기준으로 월 소득 500만원 이상 600만원 이하라고 합니다. 이 중 어떤 수치가 더 정확하다고 느껴지시나요? 솔직히 중산층이고 나..
가면 증후군에 대해 들어보신 적 있나요? 본인의 성취를 능력보다 운 때문이라 여기며 불안해하는,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앓고 있는 심리증상입니다. 우리가 이름만 들어도 누군지 아는 엄청난 업적을 자랑하는 유명 인사들도 실은 자신이 이런 사랑을 받아도 되는지 혼란스러워하고, 자신의 ‘진짜 모습’을 알게 되면 다들 실망할 것이라며 두려워한다고 합니다. 유명인뿐만 아니라 보통 사람들도 가면 증후군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성취의 ㅅ도 없는 미천한 일반인은 대체 어찌 살라는 건지... 저만 해도 그래요. 누가 너그럽고 다정한 마음으로 칭찬이라도 건네면 마음속에서 ‘엇! 저 사람은 뭔가에 속고 있는 거야! 내 실력은 아직 저만큼의 말을 들을 정도가 아니니까 어서 부인해!’라는 마음의 소리에 좌뇌와 우뇌를 잠식당합..
대한민국에서 나고 자란 XX염색체 소지자에게 특화된 훌륭한 토양의 영향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어려서부터 불만이 참 많았습니다. 불만투성이 인생이다 보니 이놈의 세상이 대체 어디서부터 글러먹은 건지 좀 더 체계적으로 배우고 싶어서 사회학을 복수전공했는데, 그로 인해 형성된 사회학 전공자에 대한 내적 친밀감이 이 책 덕분에 오랜만에 최대치를 기록했어요. 좋은 게 좋은 거라며 본인의 것을 뺏기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서만 선택적으로 둥글둥글한 다수결 신봉자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사회적 문제점과 위계관계에 대해, 전공을 살려 학문적으로 진단한 사회학 교수님의 책을, 제가 사랑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그야말로 광대가 하늘높이 승천한 것도 모른 채 후루룩 읽어버렸습니다. 프롤로그의 ‘읽으면 우울해지는 글을 쓸 것이다’..
어려서부터 언니가 있는 친구들이 참 부러웠습니다. 나보다 3년 일찍 태어난 엄마의 아들 때문에 인생 첫날부터 줄곧 입은 옷이 당연하게도 바지 일색인 것이 지겨워 ‘이왕 옷을 물려 입어야 한다면 치마를 입고 싶다’는 단순한 욕구도 한몫 했고요. 언제든 내 편인 동성의 동년배 인생선배가 있다면, 친구와 이야기할 때 어느 정도 요구되는 자기검열을 내려놓고도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을 테니 하루하루가 얼마나 즐거울까 싶어 엄마에게 언니를 만들어달라며 조르기도 했습니다. 물론 언니가 있는 친구들은 나름대로의 고충을 토로하며 ‘상냥하고 다정한’ 오빠에 대한 판타지를 풀어놓았고, 그렇다면 우리 서로 집에 있는 생명체를 교환하는 게 어떻겠냐며 실없는 거래를 제안하기도 하고요. 그렇게 잠깐일 줄 알았던 언니에..
Image from google 여러분이 살면서 들어본 가장 인상적인 개소리는 무엇인가요? 제게 물으신다면 당장 떠오르는 것으로, 한때 밈으로까지 자리잡았던 ‘술은 마셨지만 음주운전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최근의 ‘페미니스트 대통령’ 등이 있습니다(할많하않). 워낙 시대가 흉흉하고 각박해져서 (올)바른 소리보다 개소리가 더 많이 들리는 날도 더러 있는 요즈음인데, 얼마 전에는 넘쳐나는 개소리의 망망대해를 자맥질하던 중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타인의 의견에 대한 폄하의 의미가 다분한 이 ‘개소리’라는 정의는 보통 의견의 불일치로 인한 결과물일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열이면 열 누구라도 인정할 만한 개소리도 있죠. 보통 어떤 경우일 때가 그것은 영락없는 개소리인 것으로 판명될 수 있을까..
돈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요? 우리에게 돈 없이 허락되는 것은 단지 숨 쉬는 것뿐인데. 하지만 한국사회에서는 예술가에게 특히 이런 잣대를 들이대곤 합니다. 경제적으로 여유롭게 되면 오히려 예술적 영감이 떠오르지 않는다든지, 가난과 결핍이 예술혼을 불어 넣는다고도 하고요. 이 무슨 개소리인지 모르겠습니다. 예술가도 경제활동의 수단인, 직업이라는 범주에 속하는 활동이잖아요. 게다가 경제적 보상이 일한 것만큼 이뤄지지 않는 활동은 엄연히 ‘자원봉사’라는 이름으로 따로 존재하고 말이죠. 흔히 이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사람은 두 가지 유형 중 하나라고 합니다. 하나는 어마어마한 부자라 돈 개념 자체가 일반인과 다른 집단이고, 또 하나는 자신의 돈 문제는 세상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타인의 그것은 알 바..